고향,옛날의 금잔디
커다란 밤나무 아래에서...
은별(한명라)
2001. 9. 11. 00:43
시내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점에서 좌판을 펴고 밤을 파시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설마하는 마음에
"할머니, 이거 햇밤이예요?"
할머니께서는 당연한 일을 물어보는 저를 새삼스러워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 무더웠던 여름이 이렇듯 꼬리를 감추고
벌써 계절은 재빠르게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어 버렸나 봅니다.
사실 며칠전 베란다 화분옆에서 만난 귀뚜라미가 왜 그리 반가웠는지,
아마 다음 주 월요일쯤이면 저도 가을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겠지요? ^^*
제가 밤 한되만 달라고 했는데,
할머니께서는 덤으로 한주먹 더 담아 주십니다.
그 밤이 든 주머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잠시 옛 추억에 빠져 들었습니다.
제가 철없던 어린시절을 보내던 울외갓집 앞길에는
늙은 호두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지요.
제 기억엔 전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데,
가끔 울엄마께서 외갓집에 오셨다가
다시 엄마가 사시는 집으로 돌아가시면,
저는 엄마의 뒤를 부리나케 쫓아 나가
그 호두나무에 한손을 얹고 아주 큰소리로 엄마를 불렀다고 합니다.
"엄마~~"
뒤를 돌아보시는 울엄마에게
"엄마~ 까까~이~ㅇ..."
다음에 외갓집에 오실 때에는 까까를 사오라는 말이었지요.
저와 엄마가 헤어질 때의 경계선은 거기 호두나무였지요.
울외갓집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앞쪽에 자리잡은 텃밭 사이를 걸어 들어가야만이 울외갓집에 다다랐지요.
그 텃밭이 시작되는 곳에 밤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밤나무에 밤송이가 아람스레 벌어지면
저는 그 밤나무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떨어진 밤알을 줍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아침이면 우리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상만이 오빠보다, 외할머니보다도,
그리고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던 울다섯째언니보다도
제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는
양말도 채 챙겨 신지도 않고,
아직 눈꼽도 떼지 않은 부시시한 모습으로
소쿠리를 챙겨 가지고 간밤에 떨어진 알밤을 주으러 밤나무 밑을 찾아 갔지요.
아직 맨발인 발등이 이슬에 축축히 젖는 줄도 모르고
풀숲을 뒤지면서 행여 떨어져 있는 밤톨 하나라도 그냥 지나칠까봐
차근 차근 풀숲을 뒤지던 기억이란...
그리고 낡은 소쿠리에 차곡 차곡 담는 그 즐거움이란...
그렇게 알밤을 소쿠리에 하나 가득 주워 담아서 집으로 돌아가면
외할머니께서는
"아이구~ 우리 강아지 부지런도 하지..."
하시고는 제 머리를 투박한 손으로 쓰다듬어 주시곤 했지요.
아직도 그 시절의 추억은 제게 새롭습니다.
결혼후 우리 은빈이를 가졌을 때,
전 항상 꿈을 꾸면 밤나무 아래에서 알밤을 줍는 꿈을 꾸었지요.
들판에 널린 수도 없이 많은 밤을 정신없이 줍는 꿈,
밤알이 수북히 쌓여 있는 꿈.
밤송이 하나에는 보통 세톨의 알밤이 들어 있지요.
그런데 꿈에서는
아주 커다란 밤송이가 쫘악 벌어져 있는데,
아주 큰 밤톨이 딱 하나만 들어 있기도 하구요...
사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은빈이가 아들이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도 했었지요.
훗날 은빈이가 태어난 후,
태몽을 풀이 하는 책에서 보았는데
태몽으로 알밤을 보면
아주 재주가 많은 딸아이를 낳는다고 하더군요. ^^*
요즘은 도시근교에 있는 밤농원에서 알밤을 줍는 행사를 갖기도 한다고 하던데,
주말이면 엄마,아빠,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손가락이 밤송이에 찔리기도 하면서
탐스럽게 살찐 밤알을 줍는,
그런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이번 추석엔 결혼후 처음으로 이곳 창원에서 가까운
- 창원에서는 경기도 안양보다 남원이 훨씬 가깝지요? ^^*
친정나들이를 갈 것 같습니다.
그때 이 엄마가 아침마다 알밤을 주으러 갔던
그 밤나무 밑으로 우리 승완이, 은빈이를 데리고 알밤을 주으러 가야겠습니다.
엄마와 아이들이
오손 도손, 옹기 종기 머리를 맞대고
풀숲을 헤치며 알밤을 줍는 재미도 쏠쏠하겠죠?
그런데 그때까지 그 밤나무의 밤들이 남아 있을까요?
꼭 있어야 할텐데...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