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두 남매 이야기

숙(淑)이 이야기...(3)

은별(한명라) 2003. 8. 20. 10:50





숙이는 그동안 외갓집이나 우리집에서 길렀던 개들과는 다르게
동생과 어울려서 목욕도 자주 시켜 주며
그냥 보통의 개가 아닌,
마치 우리 가족들과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며 키웠습니다.


마당의 수돗가에서 목욕을 시키고 나면,
털의 물기를 미쳐 닦아주기도 전에
그 물방울을 후르르...털어내어
주변에 있던 우리들에게 순식간에 물벼락을 선물하던 숙이.


변변치 못한 나이 어린 우리들이 주인이랍시고
왼발, 오른발, 앉아, 일어나...하고 명령(?)을 내리기라도 하면
마음속으로는 가잖기도하고 시덥지 않다고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돌려 곁눈질을 하면서도
"어휴, 그냥 내가 참지..."하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들 손에 번갈아 가면서 왼발, 오른발을 살포시 얹어 주던 숙이.


그 언제인가는 숙이가 한꺼번에 너무도 많은 새끼를 낳은 적이 있었습니다.

무려 10마리가 넘는,
엄마인 숙이를 닮아서 하얀바탕에 검정 무늬가 있었던 그 많은 새끼들은
숙이의 작은 체력으로는 감당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는지,
젖을 먹으려고 매달리는 새끼들을 숙이는 힘겹다는 듯 떨쳐내고는 대문밖을 서성이고는 했습니다.


결국 몇마리의 새끼들이 영양실조라도 걸린 듯 하나, 둘 쓰러져 갔고,
그런 숙이의 새끼들을 저와 동생은
노랗게 수선화가 꽃봉오리를 터트리는 봄햇살이 내리쬐는 울타리 밑에 묻어 주고는 했습니다.


새끼에게 냉정하게 대했던 자신의 잘못을 속죄라도 하는 듯
숙이는 여러날을 새끼들이 잠들어 있는 울타리 근처를 배회하고는 했었습니다.



그런 영특한 숙이를 두고 온 가족이 오수를 떠나 온 뒤,
우리 가족들은 숙이를 너무도 잘 보살펴주고 아껴준다는 호준이에게
숙이를 맡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애써 미안한 마음을 달래고는 했습니다.



숙이가 처음 우리집으로 왔던 날로부터 만 10년이 되던 1988년의 8월 15일이었습니다.

두번의 휴학으로 그제서야 대학 졸업반이던 저는
고등학교때 친했던 친구 두명과 함께 2박 3일의 휴가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첫날은
밤기차와 시외버스를 번갈아 타고서 군산에 도착하여
또 다시 여객선을 타고 선유도를 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휴가의 절정기를 피하여 떠났던 선유도.
바닷물이 빠져나간 모래사장에서 우리들은 조개도 잡고,
마치 한폭의 그림같은 선유도의 바닷물에 발을 담구기도 했고
영화속의 여주인공인양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를 거닐기도 했습니다.
짙고 푸른 서해의 바다에 떠 있는 선유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고향 오수에 아직도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는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묶기로 했습니다.


오수에서도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더 달려서
시냇물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지않고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른다는 삼계석문이 가까운 친구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야 하는 순간에
저는 두 친구들을 데리고 호준이네 집에 들렀습니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음료수와 숙이에게 줄 빵 몇개를 사 가지고
뾰족지붕의 2층 집에 들렀을 때,


몇년만에 만나는,
이제는 너무도 달라져 버린 저의 얼굴임에도 숙이는
마치 날마다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반겨 주었습니다.


작은 체구의 숙이는 10년이라는 세월 탓인지 많이 야위어 보였고,
그 털마저도 윤기를 잃어보여 몹시도 힘이 들어 보였지만
저에게 보여 주는 반갑다는 표시만큼은 한창 나이의 숙이와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숙이와의 반가움의 짧은 재회를 마치고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을 때,
숙이의 눈빛은 아쉬움과 서운함으로 한순간 일렁이는 듯 했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대문을 나섰을 때,
숙이는 저에 곁에 바짝 붙어서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숙이가 저의 곁을 따라 나온 것은
오수국민학교의 정문이 있는 울타리가 끝나는 지점,
원불교의 뒷담이 끝나는 경계까지 였습니다.


예전에는 아무리 멀고 먼 길이라 하여도 우리들 곁에서 말없이 동반자가 되어 주고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 주었던 숙이는
뾰족지붕의 예전의 우리집 대문에서 부터 100M도 채 되지 않는
오수국민학교와 원불교의 담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조금도 더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안으로 더 들어가지도 않은 채로
마치 자신의 발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그 자리에 단단하게 묶어 두기라도 한듯 그 자리에 서서
저에게서 단 한번의 시선을 떼지 않은채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차역을 향하여 친구들과 함께 걸어가면서도
숙이에게 이제 그만 집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하지 않았고,
이리 오라는 손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언제까지라도 저의 모습을 자신의 눈속에 담아 두고 싶다는 듯
우두커니 서 있는 숙이의 모습에
저 또한 몇번이고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숙이의 모습을 저의 기억속에 마지막으로 새겨 가지고 온 이후,
숙이는 저 뿐만 아니라
엄마와의 몇번의 만남과 헤어짐에서도 그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반가움의 짧은 해후가 끝나고
또 다시 긴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오면
울 엄마에게도 오수국민학교와 원불교 뒷담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자신의 발길을 우뚝 멈추어 서서는
엄마의 모습의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내내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엄마를 통해서 전해 듣던 숙이의 소식을
이제는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여전히 외갓집에 다녀 오셔서 묵직한 보따리를 풀어 놓으시는 엄마께
언제나 그랬듯이 숙이는 잘 있더냐고 물었더니만,

어느날 갑자기 숙이가 집에를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호준이와 호준이 엄마 아빠가 여러날을 아무리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는데도
숙이의 행방을 아예 알 수 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토록 영특한 숙이가 처음ㅡ보는 낯선 사람을 따라 갔을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행여 경이처럼 쥐약 먹은 쥐를 먹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더욱이나 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체구의 10년도 훨씬 더 넘은 늙은 숙이를 개장수들이 잡아 갔으리라고도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쉽사리 낯선 사람에게 잡혀 갈 숙이도 아니었습니다.
행여나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그 동네에서 숙이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호준이네 식구들이 그토록 숙이를 찾아 헤메었다는데 모를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엄마께서는 그러셨습니다.


영특한 개들은 자신의 살아야 할 만큼 다 살았다고 생각이 들면은,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이 들면은,
주인에게 자신의 숨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동안 자신이 보아 두었던 깨끗한 곳으로 가서 자신의 최후를 맞이한다는 말이 있다구요.


정말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인지,
그게 사실인지는 저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정말로 그런 말들이 있다면,

그래서 숙이도 자신이 떠나야 할 때를 너무도 잘 알기에
자신을 거두워 주었던 주인들에게 차마 마음 아픈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아무도 모르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만의 장소를 찾아가서
영원히 깨지 않을 깊은 잠에 빠져 들었을 거라고 저는 믿고 싶었습니다.


가끔씩 자신을 잊지않고 찾아 와 주는
울 엄마와 우리 가족들에게 보여 주었던 숙이만의 이별 방식.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오수국민학교 울타리와 원불교 뒷담이 나란히 끝나는 그 자리에서
평범한 개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발걸음을 멈춰 설 줄 알던 숙이.


그런 숙이의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어쩌면 자기 혼자 떠나야 하는 죽음의 길마저도,
죽음의 장소마저도,
숙이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우리 모두 숙이의 죽음을 눈을 직접 확인한 바가 없기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숙이를 아직도 기억속에 담아 두고,
아쉬워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숙이가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는 것은 아닌지...
아마도 숙이의 많은 새끼들은
대를 잇고, 또 이어서
지금도 오수의 어느 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단지 한마리의 개일 뿐인 숙이.


그 숙이조차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그 죽음을 준비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네 인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요?


제 마음속에 물음표 하나 던져 봅니다...